점잖고 차분하며 적막한 여름 안녕하세요. 아주 짧고 굵게 비가 내리고 난 뒤 기온은 멈추지 않고 오르는 중입니다. (에어컨 틀어두고)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말이 제대로 들어맞는 이번 7월, 님은 그 어느때보다도 건강 잘 챙기셨나요? '헉'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더위를 스윽- 비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목 위로, 그러니까 얼굴에는 땀이 잘 안 나던 것이 장점 아닌 장점(?)이었습니다. 요즘 같이 더운 날씨 속에서도 마치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쉬웠죠. 축구를 하거나 격한 운동을 해도 남들 눈에는 땀 한 방울 안 흘리는 것처럼 보여서, "너 왜 안 뛰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목 아래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크고 작은 땀의 게릴라전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송골송골 맺힌 땀이 티셔츠를 적시는 건 예삿일이고, 경추부터 요추까지 시원하게 길이 나있는 '경-요 고속도로'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도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그것이 하나의 부끄러운 콤플렉스였는데, 지금은 그저 요란한 여름을 제대로 보내고 있다는 증거로 느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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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요란하고 소란하며 혼란스러운 이유는 또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몸에 열기가 오르면 노르에피네프린, 도파민, 세로토닌 등 각종 신경전달물질이 활발하게 분비되어 몸 전체를 타고 활동성을 촉진시킵니다. 그러면서 모든 감각이 증폭되어 받아들여지고, 감각수용체가 쉽게 자극되는 것은 물론 피부 혈류량과 체내 대사율이 빨라집니다. 평소보다 좀 더 예민해지거나 더 큰 자극을 원하는 (이를테면 음악의 볼륨을 키우는 행위 등)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여기까지가 뇌피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리학적 관점에서 봐도 소란스러운 여름은 다소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서두가 길었네요. 제게 여름은 '시끄러운 계절'입니다. 내면과 바깥 모두요. 더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뒤엉켜 있는 생각들은 마음의 온도를 한껏 높여두기도 합니다. 실제로도 각종 페스티벌은 더위를 날려버릴 만큼 대형 스피커를 앞세워 한여름 밤에 진행되기도 하고요.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 싶었달까요. 자연스럽게 반대편에 위치한 '정적'이라는 키워드가 떠올랐습니다. 대부분의 경험에서 정적은 차가운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혼자서 '이건 무조건 터지는 개그다'라고 생각하고 던졌는데 돌아오는 [싸늘한] 분위기라던가, 옆자리 테이블에 앉은 커플의 날카로운 말이 오간 뒤 생겨난 [차디찬] 적막이라던가.
그러다가 실제로도 (청각적 심상 위주) 정적의 순간들을 만났습니다. 온종일 소음 가득한 세상에서 찰나같이 있다가 도망가는 녀석. 아쉬우면서도 잠깐 그렇게 정적을 만끽했다는 것 자체가 만족스러웠습니다.
올여름 애플망고빙수보다 더, 에어컨 파워냉방보다 더 시원한 '정적'의 가치를 느껴보시는 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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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 무척 짜릿한 1분
🎧 문명을 역행하는 기분
🗒️ 공백도 그 자체로 충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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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보통 새벽 5시 40분에 일어납니다. 대뜸 무슨 TMI인가 싶겠냐마는, 소제목과 연관이 있습니다. 핸드폰에는 3번의 기회를 저장해 둡니다. 10분 간격으로요. 그 기회를 놓치면, 그때도 역시 서늘한 아찔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아무튼, 최근에 몇 차례 알람이 울리기 직전에 눈이 떠져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세상은 온통 고요함 속에 있었고 제쳐놓은 이불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미풍 선풍기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죠. 지금 일으킬 수 있는 작은 기적을 만들어 내면서 그 정적을 만끽했습니다.
왜냐하면 1분 뒤에 곧 알람이 켜질 예정이었으니까요. 마치 다른 사람과 내기를 하고 패배하기 직전까지 몰리다가 역전승을 거두어 내는, 도파민 터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심호흡 몇 번에 알람이 울렸고, 잠깐의 1분은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조용한 방 안에서 '오롯이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꽤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평소에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대화하며 크고 작은 소리를 나누게 되는데, 그 새벽 시간은 온전히 '나'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제주에서 한 달 동안 있으면서 시작한 아침 요가와 명상 덕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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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천근만근 피곤할 때가 많지만, 그렇게 정적을 소화시키고 몸 이곳저곳을 비워내면 그 짧은 순간이나마 리프레시되는 경험을 얻습니다. 이제 다음 목표는 조금 더 길게 조용함을 유지해 보는 것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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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침에 출근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는데요. 단테의 신곡 [연옥]과 [지옥]에 나올 법한 인파와 열기를 경험하며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요즘입니다. 서로 의도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출퇴근길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표정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정적(에 가까운)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바로 "이어폰 꽂아서 노래 듣지 않기"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악은 언제나 삶의 모든 순간에 존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거스르기 어려운 시도였습니다. 이때 도움을 얻었던 것이 아주 얇은 책 한 권이었습니다.
노래를 듣지 않고 책을 읽다보면, 두 가지 상황으로 빠지게 됩니다. 1) 매우 집중한 나머지 사람들과 대중교통이 만들어 내는 소리에 아랑곳 하지 않고 집중하여 결국 고요와 정적을 얻게 되거나, 2) 매우 집중한 나머지 눈 한 번 살짝 감았다 떠야겠다는 찰나 바로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버려서 내려야 하는 역에 간신히 눈을 뜨고 허겁지겁 내리는 쪽으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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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나저러나 정적은 경험했는데, 전자의 경우를 조금 더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핸드폰을 쉴새없이 손으로 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하고, 무선 이어폰을 꽂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는 아니지만) 무하한의 영역에 들어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지하철이 하나의 정거장을 이동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약 2~3분 정도 걸립니다. (1호선, 경의중앙선 등 제외) 빠르고 편리한 대중교통을 타면서 역설적으로 느리고 수고로운 행위를 하고 있는 셈이었죠. 책을 읽다가도 덮어서 고막을 강타하는 정차 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때면, 문명을 역행하는 기분이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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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기록에서도 '정적'은 꽤나 심심한 쾌감을 선사합니다.
가장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때가 바로 여행 계획을 세울 때가 아닐까요? 대략적인 일정만 정해두고 이제 하나둘씩 채워나가야 하는 바로 그 시점, '기록의 고요'는 괜스레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열정적이면서 다채로움이 넘치는 여행을 위해 제일 먼저 빈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죠.
굳이 여행이 아니더라도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은 공책이나 비어 있는 노션 페이지, 캘린더를 보면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이 단어는 어떻게 표현하는 게 좋을지, 이 일정은 저 다른 일정이랑 연결시키면 되겠다 하면서요. 그러면서 조금씩 차분해지고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떠오르는 단어를 적거나 날짜를 입력하면 어느새 마음에는 얼마간의 정적이 유지됩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는 보통 이런 순간에는 커피숍에 있는 편입니다. 좋아하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행위를 지속하다 보면 얻게 되는 '명상적인 상태' 때문입니다. 이는 곧 소란스럽지 않은 나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따뜻한 라떼 한 잔 시켜두고 다이어리를 펴서 적당히 그루브 있는 재즈하우스를 듣다 보면, 커피와 수첩과 음악은 온데간데 없고 이 공간 자체를 유영하는 기분입니다. 어쩌면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은 걸지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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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누구보다 유약하고 주변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으며, 내면의 극단을 자주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적', '고요', '균형', '평화' 등의 키워드에 관심이 가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고요.
갑자기 문득 작년 여름은 어땠을까 하고 24년 7월과 8월 레터들 보고 왔는데, 7월은 [라떼와 플랫화이트], 8월은 [하늘과 구름과 노을]이라는 주제로 썼습니다. 그중 8월 레터의 끝자락에는 '소란스럽지 않은 더위'라는 소제목을 달아두었더군요. '여름의 정적'이라는 제목은 이때부터 정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궁금하시다면 저 위에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처서매직'을 기대하면서 여름의 또 한 달을 버티기에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고요 속에서 다가오는 열기와 빗물과 땀방울 모두 사그러들 수 있는 8월이 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호에서 만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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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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